2017/05/31

"하나님도 마음을 바꾸실 때가 있습니다"


32: 7-14

주일학교 선생님이 한 소년에게 요나와 고래 이야기를 들려준 후 가르친 것에 대해 물었습니다뜻밖에 소년의 대답은 "요나가 고래에게 복통을 일으키게 했다"였습니다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고래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요나서에는 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많은 요나서의 설교들은 요나의 불순종에 초점을 둡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요나가 지구 끝 다시스로 도망간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물론 이 말은 맞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문장은 모든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요나는 내심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는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0-11)고 반문하시며 요나서를 끝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이것이 요나서의 진정한 교훈인 것입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흥미로운 발견입니다그는 엄격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한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소돔의 백성에 관해 하나님과 논쟁을 벌였습니다하나님은 그들의 사악함을 보시고 그 도시를 파괴하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십여 명의 의로운 사람들이 그 곳에 있을 수 있다면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냅니다불행히도 소돔에는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주장에 흔들리는 모습은 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사람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 하셨지만 곧 하나님은 사울이 그러한 책임을 맡기에 합당하지 않은 인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시고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도시를 멸망 시키려고 하신다는 것을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상치 못하게 니느웨의 모든 백성들이 회개했습니다. 궁전에 있는 왕으로부터 거리에 널려있는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났습니다그러자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는 니느웨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 결정은 요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 시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파괴와 재난의 집행을 멈추실 것입니다요나는 완전히 굴욕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그는 어쨌든 그 사람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너무 화가 나서 니느웨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앉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기에 앉아있을 정도로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정을 바꾸시는 하나님,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나눌 말씀의 주제입니다.

당신이 혹시 당신에게 미운 털이 박힌 사람들이 멸망 당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를 주저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 하실까요?

타락한 세상을 향해 진노를 선언하신 전능자의 마음에 그런 변화가 올 수 있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 백성들의 장래를 놓고 산 정상에 올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곳에서 사십 일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다시 돌아올 지 궁금해 했습니다. 모세가 떠난 지 40일이 다 되어가며 산에서 생겼을 어떤 불길한 일을 상상했습니다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형제 아론에게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라"는 터무니 없는 요청을 했습니다.

아론은 웬일인지 백성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인기가 폭락한 모세 대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추앙 받고 싶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론은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들어주는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항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굴복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아론은 대중의 요구에 굴복해서 사람들의 인기와 지위를 얻었습니다. 아론은 그들이 요구한 것이 틀렸다는 것을 지적해야 했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1)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된다." 2) "너는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는 생각할 겨들도 없이 곧바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습니다.

아론은 사람들에게 모든 금고리를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는 금을 녹여서 금형에 넣고 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황금 송아지는 애굽 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황금의 이미지는 분명히 모세를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송아지가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계명 중 하나를 깨뜨리는 황금빛 이미지를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희생 제물을 가져 와서 황금 송아지에게 바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주신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머물지 않으시면,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악마의 놀이터입니다.

같은 시각에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라며 모세에게 하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8.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7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백성"이 아닌 "너의 백성으로 언급하셨음을 주목하십시오.

7b.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하나님이 너무나 화가 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인할 준비가 되어 계셨습니다여기서 타락(부패)하였다로 번역된 단어는 대홍수를 앞두고 있던 노아 시대 사람들의 활동을 묘사할 때 사용된 것과 동일합니다.

노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한 일을 보시고 그 백성들을 파멸시킬 준비가 되어 계셨습니다.

9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내가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눈 여겨 보셨습니다.

10b.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은 그들을 제거하고 모세를 노아에 이어 제 3의 아담으로 사용할 준비까지 마치셨습니다그래서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9b.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뻣뻣한 지를 보셨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제주도에서 멍에를 뒤집어씌운 소를 끌고 몇 천 평 되는 밭을 며칠에 걸쳐 갈아보았습니다. 멍에는 쟁기를 끌기 위해 소의 등에 얹는 막대입니다. 밭을 갈며 속도를 높이거나 방향을 바꾸려면 (나무를 둥근 고리 모양으로 다듬어 코의 양쪽 코를 관통 시킨 코뚜레로부터 단단한 끈으로 길게 연결한) 고삐를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세게 당기면 됩니다.

고삐의 강도만 잘 조절하면 대개 수월하게 밭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 밭 고랑을 다 갈고 방향을 바꿀 때 예기치 못하게 소가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틀 때가 있습니다. 놀라서우와, 우와혹은저라, 저라하고 소리쳐도 작심한 듯 전속력으로 방향을 벗어나는 소가 있습니다. 그 때 느꼈던 얄미운 소 등의 모습이 영락없이뻣뻣한 목덜미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8-9.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고 있다 …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들은 고의적으로 주인의 방향을 벗어나 달음질 치고 있는 완고한 얄미운 황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용감하게도 모세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매어 달려 애원합니다. 모세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그들은 하나님이 "큰 권세와 힘센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바로 그 사람들이라며 매어 달립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집트인들은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죽이시려고 그들을 불러냈다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진노와 재앙을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걸고 막아 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이루신 성약, ,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의 약속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결과적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을 들으시고 마음을 바꾸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을 향한 진노와 재앙이 거짓말처럼 멈춥니다.

웬일인지 우리는 하나님이 한 번 마음을 먹으시면 결코 마음을 바꾸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고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중보자 모세는 정적이며 동시에 논리적인 탄원으로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고 사람들을 향한 파멸을 거두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셨고 이스라엘의 사형 집행을 앞두고 진노와 파멸을 정지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얼마든지 그 결과를 바꾸십니다. 모세의 애원 덕분에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으로의 계속된 여행 허가를 내리셨습니다.

모세는 돌아서서 증거판 둘을 손에 들고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산 밑에 도달했을 때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 "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알려주었습니다.

모세가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무슨 승전가도 아니고, 패전의 탄식도 아닌 흥겨운 노래 소리였습니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그 때 모세의 머리 뚜껑이 열렸습니다. 순식간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 돌 판 두 개를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닌 아론에게 분노했습니다. 이 일로 그 날에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살상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태가 수습되고 모세가 말하였습니다. "오늘 너희가 저마다 자녀와 형제자매를 희생시켜 너희 자신을 주께 드렸다.”

그리고 다시 이튿날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크나큰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주께 올라가서,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겠다."

이제 공은 약속의 땅을 향해서 엔트리 허가를 받아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여행 허가를 받았지만 범죄 기록이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형 집행 정지나, 기소 중지 상태입니다. 입국심사대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 범죄 기록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추방될지 모릅니다.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와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절호의 찬스가 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처럼 구원의 가치가 없는 도시를 구원하시는 것에 대해 분개했지만 사람들이 회개하며 구원에 이르는 것을 보며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회개한 니느웨보다 더 악한 북왕국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니느웨처럼 재앙을 거두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을 보시며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오늘 저와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니느웨를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처럼 멸망의 상황에 처해있는 이웃과 친구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7/05/27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당신과 나는 믿음으로 무엇을 할 것입니까?"


히브리서 11: 8-13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건축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믿음으로 칼빈의 제자 존 녹스는 16세기에 제네바에서 스코틀랜드로 건너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하고 장로교를 창시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 목사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와서 PCUSA 설립에 참여하고, 2차 대륙 회의 대표단으로 건국을 주도하고, 1776년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 서명했습니다.

믿음으로 장로교인 언더우드는 1884년 한국으로 건너와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과 대학과 교회들을 설립하고 57세에 병으로 소천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진계완목사는 1988년 갈보리장로교회를 설립하고 포틀랜드와 비버튼 지역 일대에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으로 갈보리장로교회는 백동인목사를 청빙하였고, 백동인목사는 2014년 가족을 이끌고 비버튼으로 이주하고 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갈보리장로교회는 2015 91일 포틀랜드 노쓰로 교회를 옮기고 제단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부터 Gresham Portland downtown의 크리스천들이 믿음으로 갈보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들어서며 Beaverton 지역에서 믿음으로 갈보리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당신과 내가 믿음으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질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신앙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알아야 할 두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신앙은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의 집합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의 현실을 인식하는 안경입니다.

신앙은 보는 방법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외출 후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잔소리를 합니다

손을 씻어야 감기에 안 걸리지!” “네 손엔 온통 세균투성이야!” 잔소리에 역겨운 아이가 소리칩니다. "세균이 어디 있다고 그래?” “세균을 본 적이 없잖아!”

그렇습니다. 목사는 설교 마다 예수, 또 예수를 부르짖습니다

믿는 분들 가운데서도 마음 속에 이렇게 반응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어디 있다고 그래?” “예수를 눈으로 본 적이 없잖아!”

어떤 분들에게는 믿음은 보이지 않고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때때로 당신과 나는 맹목적인 믿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는 믿음은 장님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좋은 판단이나 당신의 좋은 이유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완전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불가능한 꿈이나 희망을 믿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국가대항 축구경기에서 2:1로 지고 있는 우리 국가대표팀이 경기종료 2분을 남겨놓고 이대로 질 경우 예선에서 탈락하고 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손홍민 선수를 투입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손홍민선수가 경기장에 나가기 전에 슈틀리케 대표팀 감독에게 다가와서 한 골을 넣을까요? 아니면 두 골을 넣을까요? 하고 묻는 것과 똑 같은 경우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 드리는 믿음은 단순한 조커 선수가 아닙니다.

저는 히브리서 작가가 신앙에 대해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싶습니다. 신앙은 당신이 바라는 것을 확신하고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도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당신은 위험한 날씨, 위험한 길을 운전합니다.

믿음으로 당신은 수술실에 들어갑니다.

믿음으로 당신은 오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믿음으로 당신은 가정을 위해 희생합니다.

믿음으로 당신은 미래에 투자합니다.

인생은 믿음으로 삽니다.

신앙은 우리가 보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미국 지점에서 캐나다 지점을 가로질러 단단히 연결한 로프를 건너는 한 곡예사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전자는 점점 커져가는 군중의 박수에 맞춰 거친 폭포 물줄기가 바닥을 향해 쉴 사이 없이 곤두박질하는 그 계단식 물줄기 바로 위에서 줄타기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걷기가 성공하자 도전자는 다시 자전거를 가지고 로프를 올라가 폭포를 횡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피날레가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마차에 사람을 태우고 건널 차례입니다.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곡예사에게 묻습니다. 정말 마차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때 곡예사가 묻습니다. "글쎄요, 그것은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수레에 함께 타고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 갔습니다. 옮겨 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났습니다.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행동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을 봅니다.

다시 1988년에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비버튼 지역에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진계완 목사님이 주도하는 새로운 장로교회를 조직하고 설립했습니다.

1988 87일 오전 11시에 Rooter Rock State Park에서 갈보리장로교회의 감격의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주 뒤인 1988 821일 오후1시에 비버튼 지역의 Somerset Christian Church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8 109일에 청년회와 남선교회가 조직 되며 교회가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마리아 여선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부에서 복음전화를 개통해서 하루 24시간 5분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90년도 예산이 당시 27만 불에 이르렀습니다.

중간에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으나 교회는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보리공동체를 사자 굴과 타는 풀무 불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불기의 접근을 막아 주시고 사자의 입을 봉쇄하셨습니다.

우리는 갈보리장로교회의 제 2의 부흥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노회의 중재로 힐스보로 장로교회가 매주일 오후 130, 그리고 토요일 아침 시간에 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사용료는 토요일만 사용할 경우 불과 월 100불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 좋은 제안을 사양하였습니다. 여러 한인교회가 밀집해 있는 그곳보다 한인교회들이 모두 떠난 다운타운과 포틀랜드 동쪽 지역을 하나님이 바라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현재 포틀랜드 도심의 제일장로교회 및 동물원 26번 하이웨이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340명이 출석하고 있는 성 안드레 교회와 장소 사용에 관해 협의 중에 있습니다. 최종 협의가 끝나면 여러분에게 주일예배 장소 이전에 관해서 가부를 물을 것입니다.

신앙에는 일단 믿음으로 앞 일을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믿고 확신하는 일에 대해 행동하는 용기라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지역으로 교회를 이주하고 22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이 주 중 세 차례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기후와 트래픽과 그밖에 이유로 예배에 이르는 용기를 막는 시험들이 많았습니다.

그라나 신앙은 견뎌내는 결심입니다. 본문 13절을 읽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약속 된 것을 (즉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믿음으로 살았다.” 나는 그것이 신약의 가장 위대한 말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삶에 적용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믿음으로 살았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생 일대에 수행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 받아야합니다. 참되다 거나 아름다운 것이 역사의 모든 맥락에서 완전한 의미를 갖지 않으므로 우리는 오직 신앙으로 구원 받아야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리 고결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성취할 수 없으므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올 해 70이 넘으신 여 성도님들이 아름다운 봉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 성도님들은 부지런히 거동이 불편하신 교인들을 예배에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 이 지역 한국인 시니어들을 위한 매주 우리 교회에서의 시니어센터 섬김 활동도 기도 중에 있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오늘 당신이 앉아있는 이곳은 제가 지금까지 바라본 예배당 가운데 가장 예쁜 교회입니다. 전 세계 곳곳에 많은 교회 건축물이 있지만 이 공간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어느 날 제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당신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대로보다 오솔길을 택해서 온 사람 같아!”

우리는 길고 구불구불 한 오솔길을 여행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개척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 밑의 지반은 온통 반석입니다. 그래서 큰 대로를 일구기가 불가능합니다.

큰 바위를 피해 흙이 있는 곳으로 길을 파다 보면 오솔길이 됩니다.

우리 뒤를 따르는 또 다른 세대의 순례자들도 이 길을 걸을 것입니다.

숲과 바람과 꽃잎 날리는 이곳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 뒤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으로 이끌 이 길을 오늘 우리가 더욱 다듬어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7/05/24

"당신 안에 있는 방주의 존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5 10-22

성경에는 모세의 방주, 노아의 방주와 언약궤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세 방주는 모두 영어 성경에서 Ark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방주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앞서가심을 상징하는 속죄소입니다.

출애굽기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한 용감한 어머니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이집트 왕 바로는 새로 태어나는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목소리가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갓 태어난 핏덩어리 아이가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3개월 동안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를 숨겨 키웠습니다. 그러나 이 아기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아이 울음 소리가 커졌을 때 그녀의 신앙은 더욱 위험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어머니의 신앙이 담대해 진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녀는 나일강에 즐비한 갈대를 꺾어다가 단단하고 물이 새지 않는 작은 요람 보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이 아기의 장래를 지킬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그 아이를 새 보트에 넣고 강변으로 가져가 나일강 갈대 숲 사이로 띄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만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어린 핏덩이가 탄 보트는 구원의 방주였습니다. 이 방주는 갓 태어난 모세가 바로의 딸에 눈에 뜨일 때까지 안전하게 지켜주었습니다. 이 갈대 방주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계획과 개입이 어떤 결과를 이어지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방주가 지어지기 훨씬 전에 다른 방주가 있었습니다. 6 5-8에 보시면,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 뿐임을 보시고서,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그러나 노아 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홍수 심판이 결정된 가운데 노아 만은 구원 받을 것이 예고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고, 그가 사는 가까이에는 강이나 바다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에게 큰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홍수가 나고 땅에서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하늘의 창문이 열리고 비가 40 주야로 땅에 쏟아졌다고 말씀합니다.

600세 되던 해에 노아는 그의 아들들과 아내, 그리고 짐승들의 대 퍼레이드를 방주로 이끌었습니다. 지구 표면에 물이 차오르며 산에 지어진 방주가 떠올랐습니다. 단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결과 그가 지은 배가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막이 어떻게 지져야 하는지 그 안에 들어갈 가구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막에는 일곱 가구를 배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방주(ark, 언약궤) 였습니다.

언약궤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길이 4 피트, 너비와 높이가 2.5 피트 크기로 만든 직사각형 모양의 방주였습니다. 상단에 천국을 대표하는 날개 달린 생물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들고 겉에 금으로 칠하긴 했어도 언약궤는 히브리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성물이었습니다. 방주에는 긴 장대가 앞 뒤로 뻗어 있어서 이동시에 쉽게 들어 올려 레위인들이 메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1. 요단 강의 방주


이제 성막이 완성되자 이 방주는 항상 거룩한 지성소에 배치되었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 그 방에 들어가는 경우를 빼고는 아무도 그 방주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년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궤가 있는 지성소의 긍휼의 자리에 이스라엘을 위해 희생된 어린 양의 피를 가져와, 사람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한 희생 제물로 그 자리에 쏟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여행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들 이었기 때문에 성막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가는 곳마다, 레위인들이 방주를 메고 갈 것입니다 이 방주는 이스라엘이 가는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상징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향해 사람들을 인도할 계획을 세우고있을 때, 언약궤에 대한 강력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 3 3-4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라. 제사장들이 너희가 가는 길을 안내할 것이다. 너희와 언약궤 사이는, 이천 보쯤의 거리를 띄우고, 그 궤에 가까이 가지 말아라."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따라 요단 강을 건너기 위해 장막에서 나왔을 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그 다음 홍해 도하만큼 극적인 아름다운 사건이 전개됩니다.

방주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에 이르렀을 때, 강물은 제방까지 가득 차 올라 있었습니다.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잘 알고 계시죠? 그러나 제사장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3:16.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다. 그리고 사해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완전히 끊겼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리고 17절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것을 봅니다. "온 백성이 모두 요단 강을 건널 때까지, 주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보다 앞서 가시며 당신의 길을 예비해 주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당신 삶의 모든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앞서 방문하셔서 거기에 미리 머물고 계십니다.

3:4. "너희가 이전에 가 보지 않았던 길을 가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멘 방주가 너희가 가는 길을 안내할 것이다."

이전에 가 보지 않았던 길을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에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기 전에 언제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간을 낭비합니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노인이다. 그래서 나는 결코 이전에 일어난 적이 없는 내 인생의 많은 어려움을 보고 있다."

솔직히 요단의 거센 물길을 앞에 두고 이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차가운 물이 두려우신 가요? 거센 물결이 두려우신 가요? 살고 싶으신 가요?

돌아온 길을 동경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동행을 믿으십시오. 그렇습니다. 혹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계곡을 지나고 계실지라도 주께서 앞서 가시며 원수를 제거하시니 앞의 찬 물결을 두려워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의 감정이 아직 그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십시오. 승리와 환호의 미래 비전을 미리 바라보실 수는 없으신가요?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우뚝 서 계십니다. 그는 내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가 보지 않았던 넘쳐 흐르는 요단 물줄기에서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전쟁의 폭풍 한가운데서 둑까지 차오른 물을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안전하게 건너, 꿈에 그리던 가나안 복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약속하신 그 땅의 새 주인으로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놀라지 말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위험한 길을 내가 먼저 가서 네 앞 길을 예비하겠다."

이것이 요단의 방주의 의미입니다. 요단의 언약궤, 하나님의 영원한 실체입니다.


2. 여리고의 방주


계속해서 여리고의 궤는 하나님이 강력히 살아계심을 보여줍니다.

여리고는 용맹스런 군사들로 보호받는 적들의 최대 거점 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여리고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허약한 비군사 공동체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어떻게 여리고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여호수아가 도시를 점령하는 전략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엿새 동안 그 성 주위를 날마다 한 번씩 돌아라 …. 7일 째 되는 날에, 너희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동안, 성을 일곱 번 돌아라. 제사장들이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백성은 큰 함성을 질러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있는 전투 기록입니다. 그리고 물론 적의 진지가 무너져 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전략이 방주입니다.

성 주위를 도는 행렬은 6일간 하루 한 번, 제 칠일에는 일곱 번, 백성들은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군대가 전투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방황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연합 기도와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는 제사장들의 단 한 번의 나팔 소리에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는 힘입니다. 주님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성도들에게는 두려움과 낙담, 질병과 고통의 산과 언덕이 낮아집니다. 소원과 분리와 외로움과 절망의 벽이 무너집니다.


3. 빼앗긴 방주


약속의 땅에 도착한 후 이스라엘은 슬프게 죄를 지었습니다. 방황하는 광야에서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버립니다. 그 결과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그들에게 방주를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강력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방주가 머무는 곳마다 블레셋 백성과 우상들이 멸망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무섭게 내려치자 그들이 사무엘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신의 궤를 돌려 보내어, 그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지 않게 해주시오!" (삼상5:11)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는 악과 그 주변에 큰 혼란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블레셋에게 방주를 빼앗겼던 것은 이스라엘의 죄와 불충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우리의 결재에 맡겨 놓으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임재를 위해 십자가의 징표를 지녀야 합니다.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 그 분의 임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방주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솔로몬은 그 주변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성전을 파괴했을 때 이 방주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성경에 마지막으로 언급된 내용이 있습니다. 밧모 섬의 감옥에 갇혀있던 요한은 환상 가운데 영원의 비전을 포착합니다.

11:19.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방주)가 보였습니다. 그 때에 번개가 치고,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그의 약속의 승리였습니다.

그 분의 기름 부으심은 이 땅에서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응답, 즉 하나님에 대한 대한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한 마음의 "방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64-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온 힘을 다하여서, 온갖 악기와 수금과 거문고를 타며, 소구와 꽹과리와 심벌즈를 치면서, 주 앞에서 기뻐하였다.”

방주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 오는 기쁨 가운데서, 사람들은 예배의 기쁨에 빠져들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온 백성이 주님 앞에서 하나되는 일치감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 안에 있는 방주의 존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당신은 요단의 방주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2) 당신은 여러고의 방주를 순종함으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언덕을 낮출 수 있습니다.

3) 블레셋에 빼앗긴 방주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누리기 위해서, 그리고 예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당신은 그 분의 부르심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당신 마음과 현실을 짓누르던 고통과 두려움의 언덕이 낮아지고 승리의 함성이 도처에서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2017/05/21

만선의 기쁨을 누려 보시시 않으시겠습니까?


17: 32-34

저는 이곳에 오기 전 제주도의 한 어촌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교회를 섬길 때 손님이 오거나 잔치가 있는 날이면 교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파도 거세게 이는 험한 지형의 낚시 포인트에서 밤새 매우 진귀한 생선들을 잡아 한 아름 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제 팔 길이보다도 큰 삼치, 혹돔, 말쥐치, 말상어, 농어 등이 거의 매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제 집에 들어왔고 주일 만찬도 생선이 식탁에서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시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낚시가 갈릴리 바다에서 이루어집니다. 길이 13 마일, 너비 8 마일의 갈릴리는 정말로 신선한 물로 가득 찬 호수였습니다. 이 호수는 해발 680 피트에 위치했기 때문에 호수 기후가 거의 열대성이었습니다. 요즘 갈릴리 주변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호수 주변에 9 개의 마을이 있었고 인구는 1 5천 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가에서 시몬 베드로가 소유한 두 척의 배를 내려다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을 수 있는지 물으신 다음,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낚시하러 가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깊은 데로 나가거라.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그 때 시몬 베드로가 항의합니다. "주인님, 우리는 밤새 수고하고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 밤이 최고의 고기 낚는 시간인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은 끔찍한 시간입니다. 태양 광선이 물고기를 쫓습니다. 배를 보고 지레 도망 갑니다.”

시몬 베드로는 설교야 예수님이 전문가 이시지만 고기잡이는 자기가 전문가라고 암시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으시겠지요? 예수님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주식 시장에 투자하거나 십대 자녀를 양육하는 것 같은 실제의 삶에 관해서는 당신이 전문가라고 말이지요!

시몬은 예수님을 ""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권위 있는 누군가를 드러내는 용어였습니다.
5절에는 위대한 믿음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실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반 마일 이내에 물고기가 있다고 말씀 하시니 깊은 데로 가고 있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시면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놀랍습니다.

6.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7.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fishing 스토리 중 하나이며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다시 깊은 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깊은 물이란 편안한 영역의 바깥, 즉 위험이 도사리는 곳,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 외에 가장 위대한 영적 어부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도 한때 물고기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어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낚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람 낚는 어부로 극적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사도 행전 17장에서 그는 아테네라는 호수에서 낚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올림픽을 보신 분이라면 그곳의 아크로 폴리스를 TV로 본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날 아테네는 2천 년 전과 동일하게 문화, 아름다움, 엔터테인먼트로 가득한 세속적인 도시입니다.

겁 없는 어부인 바울은 미끼를 이 호수에 과감히 던졌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행한 유명한 설교에서 그는 창조주를 먼저 언급하고 곧 바로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바울은 단순히 이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랬더니 물고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십시오.

32. 그들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해 들었을 때에, 더러는 비웃었으나, 더러는 "이 일을 두고,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33. 그런 다음에, 바울이 그들을 떠나니,
34b. 몇몇 사람은 바울 편에 가담하여 신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고, 다마리라는 부인도 있고, 그 밖에 다른 사람도 있었다.

바울의 메시지에 대해 세 가지 다른 반응이 있음을 발견하셨죠? 이 포인트를 놓치지 마십시오.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고기들이 다 덥석 바울이 던진 낚시 밥을 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물고기들이 다 바울의 낚시 밥을 물지 않은 것은 어부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미끼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순히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묻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간단한 복음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6에서 "이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 1:16)

예수님은 이전에 제자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 종류의 흙에 씨를 뿌린 사람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5.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6. 또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니,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8.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돋아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이 비유에서, 씨앗은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씨앗을 뿌렸을 때 좋은 땅에 뿌려질 확률은 25%입니다. 토양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과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수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행전 17장에도 서로 다른 수준의 물고기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빌리 그레이엄 선교 학교의 학장이자 서든 침례교 신학대 교회성장학 교수였던 톰 라이너 (Thom Rainer) " "The Unchurched Next Door"라는 책을 썼습니다라이너 교수는 2년에 걸쳐 15 명의 연구 조교들과 함께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모든 주요 연령대와 소수 민족 그룹의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라이너 교수의 연구를 참고해서 우리가 복음의 낚시 밥을 던졌을 대 물고기에 대해서 기대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본적인 반응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I. 소수의비웃는 사람만이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우리는 32 절에서 이 그룹을 봅니다.
32. 그들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해 들었을 때에, 더러는 비웃었으나….

이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이 부류의 사람들이 unchurched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저항하고 심지어 적대적입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복음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이들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라이너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미국에 살고있는 3 3천만 명의 인구 중 약 5퍼센트를 차지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유형의 물고기는 20 번 가운데 한 번 정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에 저항하지만 반대하지 않는 그룹도 있습니다. 미국인의 26%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듣지 않으려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를 내놓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람들 중 62 %가 초대를 받으면 교회에 나올 용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예배에 초대하면 5명 중 한 명이 나올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나오라고 누군가에 복음을 전할 때. 복음에 저항하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넷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아테네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한 사람도 한 때는 복음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더 나아가 숨어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여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백상어 죠스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미끼를 물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수많은 어부들을 삼켰습니다.

그는 이제 사람을 낚는 위대한 어부의 삶을 삽니다. 그가 미끼를 던지니 넷 중 한 마리의 물고기들은 이 낚시 밥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II. 더러는 복음을 존중하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반응을 주목하십시오.

32. 그들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해 들었을 때에 ….. 더러는 "이 일을 두고,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또 다른 그룹의 반응은 중립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토론에는 개방적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저항하지 않지만 복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날 미국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우리는 두 가지 큰 흐름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들은 복음에 무지하거나 복음에 대한 무관심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32절 하반 절에서 더러는 이 일을 두고,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한 사람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지만 복음에 적대적이지 않은 그룹입니다. 미국인들 중 36 %가 이 범주에 속합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존경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존경합니다. 누군가의 초대를 받으면 그들 중 86 %가 교회에 올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들 중 83 %는 천국을 믿습니다. 그들 중 70 %가 지옥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구원과 영생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III. 몇몇 사람은 복음 편에 섰습니다.


34 절을 봅니다. 몇몇 사람은 바울 편에 가담하여 신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고, 다마리라는 부인도 있고, 그 밖에 다른 사람도 있었다.

이 그룹은 복음과 교회를 수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수용 할뿐만 아니라 1 년 내에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만날 수 있는 두 번째로 큰 그룹입니다.

이들 중 95 %가 천국을 믿습니다. 그리고 80 %가 지옥을 믿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어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어부들이 와서 낚시 밥을 던져주기 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에 살고있는 10 명의 사람들 중 1 명은 그리스도를 그들과 나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들 중 97%가 누군가가 교회로 초대한다면 즉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유대인, 러시아 정교도, 불교도, 모슬림 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세례를 베푼 사람들 가운데는 외국인이 한국인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방에서 복을 전하며 보니 예외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한국의 대학생 선교단체와 더불어 복음 선포를 위해 사람을 불러모으기 위해 아주 추운 겨울 날 러시아의 한 작은 도시에서 태권도 공연 티켓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입장한 7백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진행한 태권도 공연은 30분이 채 되지 못했고 대신 제가 30분 이상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그밖에 긴 찬송을 공연했지만 그들은 거의 복음 앞에서 불평하거나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존중했고, 공연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해주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미국에서 교회에 가지 않는 3명 중 1명 이상이 교회에 나올 준비가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이웃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낚시가 내리우기만을 기다리는 물고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고대의 성경 세계에서 가장 세속적이고 이교도적인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아테네와 똑 같은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환상 가운데 주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9b.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많은 물고기가 그의 복음 미끼를 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에 너를 해치려고 너를 공격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너를 통해 구원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낚시꾼을위한 책들이 서점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도 인내없이 낚시를 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포인트에서 벗어나도 물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멀리 던진다고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도 아닙니다. 자주 던진다고 많이 잡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낚시에 인내가 필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계속 던져야 합니다. 초대장을 보내고, 때로는 미끼를 바꿔줘야 합니다. 인내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성령님께 맡기십시오.

바울은 물고기들을 볼 수 없었고 자신이 어디에 낚시를 내려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그가 단지 낚시를 내리기만 하면 많은 물고기들, 많은 이단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낚시 밥을 기다리고 있는 물고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는 한번도 복음에 관해 이웃들에게 입을 열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폴 하비 (Paul Harvey)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어부가 아니라 수족관의 수호자"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낚시 비즈니스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낚시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물고기들이 낚시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먹이를 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미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의 찰진 미끼를 가지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이 세속의 바다 깊은 데로 나가 낚시를 던져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두 배를 가득 채우는 만선의 기쁨, 백 배의 풍성한 소출을 누려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2017/05/20

"죽음 직전에도 사람이 위대할 수 있는 점"


 열왕기하 13: 14-21

엘리사와 엘리야라는 이름은 때때로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는 누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분명히 해야합니다. 엘리야가 먼저 왔습니다. 그는 단호하고 강하고 독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갈멜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맞섰습니다. 그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을 무시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어떤 사람도 그를 다루기가 쉽지 않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계승한 인물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사교적이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여러 왕에게 조언했습니다. 그 중에는 요람 왕과 예후 왕, 여호아하스 왕, 요아스 왕이 있습니다. 그는 50 년 동안 선지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국운이 요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50년 동안 왕들을 대상으로 컨설턴트를 해 주며 남의 병은 고치고 이제 자신은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
그는 14 절에서 왕과 선지자의 관계에 대해 반성하는 글을 남깁니다. 왕의 애끓는 애도는 왕이 이 예언자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그에게로 가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하고 외쳐 울부짖습니다.
요아스는 이스라엘 병거를 언급합니다. 그는 엘리야가 살아서 천국으로 올라 갔을 때 엘리사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픈 와중에 늙고 병든 예언자는 왕에게 활과 화살을 쏠 준비를 하도록 했습니다.
17. 엘리사가 말하였다. "동쪽 창문을 여십시오." 왕이 창문을 열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쏘십시오." 그가 활을 쏘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주의 승리의 화살입니다. 시리아를 이길 승리의 화살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아벡에서 시리아를 쳐서, 완전히 진멸하실 것입니다."
엘리사는 요아스 왕에게 다른 화살을 가져다가 땅을 치라고 말했습니다.
18. 엘리사가 또 말하였다. "화살을 집으십시오." 왕이 화살을 집자,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였다. "땅을 치십시오." 왕이 세 번을 치고는 그만두었다.
임금은 그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그는 화살을 가져다가 세 번 땅을 치고 멈췄습니다.
이 시점에서 엘리사는 화가 나서 요아스 왕을 책망했습니다.
19. "임금님께서 대여섯 번 치셨으면 시리아 군을 진멸할 때까지 쳐부술 수 있었을 터인데, 고작 세 번입니까? 이제 임금님께서는 겨우 세 번만 시리아를 칠 수 있을 것입니다."
찾아온 왕은 죽기 직전의 예언자로부터 책망만 받았습니다. 몇 번이나 화살로 땅바닥을 쳐야 할지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요아스 왕의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에 대해서 이 늙은 예언자가 느끼는 시리아에대한 적대감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시리아는 나중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유언처럼 남긴 그이 화살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25. 이 때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호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들을 도로 되찾았다 …. 여호아스는 세 번이나 벤하닷을 쳐서,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도로 되찾았다.
엘리사는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의 헌신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생애가 끝날 무렵에도 엘리사는 여전히 악에 대항해서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어가는 모습은 웨일스 시인 딜랜 토마스 (Dylan Thomas)가 쓴 시의 제목과 유사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시를 썼습니다. “그 좋은 밤에 온유하지 말라.”
사망은 종종 조용한 퇴직으로 묘사됩니다. 시편 4편은 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4:8.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휴식으로 표현합니다.
14:13b.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항복입니다. 더 이상의 싸움없이 굴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놓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을 유감스럽게 느껴야 할까요? 운명과 하나님을 저주해야 할까요?
엘리사는 하나님 백성의 적, 시리아를 생각하고있었습니다! 요아스 왕에게 화살을 쏘고 다른 화살로 땅을 치라고 유언했을 때 엘리사는 여전히 그의 삶의 핵심이었던 예언 활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리없이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하는 것을 보기 위해 열심히 헌신합니다! 엘리사는 죽기를 기다리기 위해 그곳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자신의 노년과 죽음을 아랑곳 하지 않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중년을 지나며 우리가 품어야 할 믿음의 생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많이 이루셨습니까? 많이 땀 흘리셨습니까? 그래서 이제 그냥 편하게 지내고 싶습니까? 다른 누군가의 옆에 가까이 있기만을 원할 것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의 일을 두려워하고 자신만 생각해야 할까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열렬히 소망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겠다라는 생의지"라고 부르는 신비한 힘과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피곤해서 더 이상의 일을 그치겠다"고 하는 반면, 또 어떤 분들은 "내가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에 분노한다. 내가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 라고 항변합니다.
이것을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한 그룹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일으키려는 열망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교회에서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한 국가에서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인류 공동체에서 불가능하리라 법이 있나요?
우리는 종종 속으로 "나는 할 만큼 했어. 이제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인수해야 해" 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구석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하기나 한가?” 라고 말하는 것도 듣습니다.
그러나 이 두 태도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복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신과 나는 그리스도에 충성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일으키는 데 부름을 받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신앙의 길에서 무엇인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압도적인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모든 살아야 할 이유와 모든 가치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열정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열정 때문에 당신과 제가 구원 받았습니다.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 쉬기까지 행하신 구원의 사역은 정말로 멋지고 굉장합니다.


그러므로 그 평화롭게 항복하려는 마지막 밤을 온유로 받아들이지 말고, 매 순간 더욱 강하게 악과 사망과 할 일 없음과, 사역하기 싫음에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2017/10/1 "To build your broken walls"

<Nehemiah 1:11> 11. "O Lord, I beseech Thee, may Thine ear be attentive to the prayer of Thy servant and the prayer o...